사이 표지

사이

짧게 스친 관계들과 오래 남은 이름에 대하여

서문

한동안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자주 들여다보았습니다.
가까워지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고,
멀어지는 데에도
분명한 이유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마음은 이름보다 먼저 자랐고,
어떤 마음은 끝난 뒤에도
제 모양을 오래 남겼습니다.
그 짧은 사이들을 헤아리다가
문득 오래된 한 사람을 생각했습니다.
너무 오래 그 자리에 있어서
미처 귀한 줄 몰랐던 사이를.

차례

  1. 배웠다
  2. 나누다
  3. 고르다
  4. 넘보다
  5. 거두다
  6. 남다
  7. 놓다
  8. 두다

처음의 모양

배웠다

너는 겨울보다 먼저 손이 차가워졌습니다.
약은 늘 가방 가장 안쪽에 있었고
아프다는 말은
그보다 조금 더 안쪽에 있었다.
나는 네 손부터 잡았고
너는 괜찮다는 말을 늘 조금 느리게 했다.
네가 나를 감싸 안으면
너의 작은 몸은 나보다도 넓어졌다.
보드라운 네 팔과 숨결 사이에서
추위는 늘 성벽 밖의 일이 되었다.
너는 따뜻한 사람이었으니
나는 그 온기에 끝이 없을 줄 알았다.
너는 웃을 때마다
검은 눈을 반달만큼 남겼고,
나는 그 얇은 어둠을
내 쪽의 우주라고 믿었다.
너는 누구에게나 따뜻했지만
내게만 허락한 세계가 있었다.
나는 오래, 아주 오래
그 질서 안에서 안도했었다.
네 작은 주먹에는 나를 때릴 때조차
펴질 자리가 남아 있었다.
화를 내는 동안에도
내 이름만은 네 입안에서
끝내 모서리가 생기지 않았다.
네가 말을 거둔 뒤에도
나는 네 침묵까지
내가 이긴 쪽에 놓아버리고
기어이 한 문장을 더 보탰다.
반달은 눈물에 먼저 풀린다.
신호가 바뀌자마자
나는 네 눈물 따위
뒤에 둘 수 있는 사람처럼
먼저 길로 내려간다.
내가 흐려놓은 네 눈은
어떻게 나보다 먼저
나를 향해 오는 차를 본 건지
너는 울면서도 내 소매를 잡아당긴다.
경적이 귀 안쪽을 다시 찢는다.
그제야 심장이 제 소리를 낸다.
나를 미워하는 일과
나를 잃는 일 사이에서
네 주먹은 먼저 펴지고야 만다.
어쩌면 늘.
너는 머리를 묶고 약을 챙겼다.
눈가는 조금 부어 있었고
버스는 제시간에 왔다.
사랑의 대가로도
너는 너를 지불하지 않는 줄만 알았다.
나는 네 온전함을
나에 대한 결손으로만 번역하고 말았다.
내가 네 하루에 남긴 것이
지각 하나도 되지 못했다는
그 무사함이
아주 오래도록 미웠다.

돌아온 자리

나누다

두 분이세요.
직원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물컵 두 개를 내려놓았다.
메뉴판에는 2인분부터 주문 가능.
식당은 사람을 세는 데 별로 망설임이 없다.
오랜만에 마주 앉았는데
너는 내가 싫어하는 파를 네 쪽으로 가져갔다.
나는 그게 조금 고마웠다.
네가 아직 먹는 동안
밥알 몇 개를 괜히 천천히 씹었다.
우리는 밥을 먹었다.
거기까지는 틀린 말이 없었다.
네가 먼저 카드를 꺼냈다.
다음엔 내가 살게.
다음은 가까울 수도, 멀 수도 있어
서로에게 다행이었다.
몇 달 뒤 너는 잘 지내냐고 물었다.
잘 지내냐는 말은 대개 화면에서 끝났고
밥은 먹었냐는 말은 이상하게 식탁까지 왔다.
나는 그런 쪽의 안부를 더 좋아한다.
밥은 먹었냐고 묻고
점심에 먹은 순댓국 사진을 보냈다.
숟가락 하나가 사진 귀퉁이에 찍혀 있었다.
초등학교 때 새 지우개를
칼로 반 잘라 친구에게 준 적이 있다.
반쪽이 되니 모서리는 오히려 많아졌다.
작은 글씨를 지우기에는 그 편이 나았다.
대신 이름을 쓰기에는 자리가 좁았다.
그 친구 이름은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지우개 냄새는 난다.
카페에서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물으니
직원이 영수증 아래를 가리켰다.
비밀번호는 여러 사람이 알아도 닳지 않는다.
너는 내 휴대전화에 숫자를 대신 눌러주었고
나는 한 번 보고 외웠다.
다음 날에는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너는 가끔
오래 만나지 못한 나를 앞에 두고도
우린 여전하다고 말한다.
나는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를 버리다
그 말을 생각했다.
마시지 않아도 우유는 우유였고
상한 뒤에도 한동안 흰색이었다.

고르다

혀에서 나온 것치고 너무 말라 있었다.
너는 단어로 찔렀고 나는 소리로 때렸다.
옆 테이블 숟가락 하나가 잔에 부딪혀 맑게 울었다.
금속은 목소리가 커져도 별로 당황하지 않는다.
나는 그게 조금 얄미웠다.
돌아오는 길 정육점은 셔터를 반쯤 내렸는데
고기가 없어도 붉은 전구는 붉었다.
어릴 때 혀를 세게 깨물면 죽을 수도 있다고 누가 그랬다.
여러 번 깨물어 봤지만 멀쩡했다.
사람은 의외로 입 때문에 잘 죽지 않는다.
그래서 잘도 그런 말을 하는 걸까
광고에는 치아교정 월 6만 9천 원.
고른 것은 대체로 비싸다. 치열도 문장도.
너는 정확한 단어를 골랐고 나는 정확하지 않은 음량으로 대답했다.
집에 와 양말을 벗으니 왼쪽 뒤꿈치에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신발은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메시지를 쓰다가 네 이름부터 지웠다.
주어가 없어도 문장은 제법 오래 버틴다.
냉장고에서는 달걀 하나가 금이 간 채 굳어 있었고,
흰자가 가느다랗게 새어
껍데기에 투명한 딱지를 만들었다.
손톱으로 떼어내려다 그만뒀다.
나는 요즘 멀쩡한 것까지 자꾸 확인한다.
그날 네가 쓰던 컵,
물에 불은 자국이 가장자리에서 반쯤 지워져 있었다.
수세미를 들었다가 갑자기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선 밖으로 나간 공을 아무도 주우러 가지 않던 오후가 생각났다.
종이 치면 어차피 모두 교실로 돌아갔다.
다음 날 비가 온다고 했다.
창밖은 아직 마르고, 네 윗입술 안쪽이 조금 헐어 있었다.
나는 어제보다 작은 목소리로 네 이름을 불렀고
너는 돌아보지 않는다.
점심에 먹은 미역 한 조각이 그제야 어금니에서 빠졌다.
피 맛이 조금 났다.
오후 네 시쯤에는 양말 한 짝을 뒤집어 신은 것도 알았다.

넘보다

너는 좀처럼 금이 가지 않았고
나는 자꾸 손톱을 길렀습니다.
내가 없으면 부족해져줘.
너는 내 쪽으로 기울던 몸을 바로 세웠다.
그날부터 우리는
같은 거리를 다르게 걸었다.
제발 이 촌극의 선악에 의문을 갖지마.
끝내 버리지 못할 선량함을
나를 위해서만 기꺼이 배반해주었으면 했다.
공평한 너에게 편애를 바라는 일이
내가 품은 가장 깨끗한 악의였습니다.
나는 네게
원인 없는 결손이 되고 싶었다.
새살이 다 오른 뒤에도
궂은 날이면 먼저 욱신거리는 것.
다 나았다고 말하는 네 입을 믿지 않고
환부의 진술을 끝까지 믿는 사람.
망각이 너를 구할 때마다
시간은 끝까지 나를 증언했으면 해.
우주의 질서는
우리 때문에 오산하지 않을 테지요.
소실된 만큼만
공백을 허락하는 질서.
나는 그 정밀함을 오래 미워했다.
네게서 내가 빠지는 날에는
부재보다 더 많은 것이
함께 사라지기를.
나 하나를 잃은 네가
자꾸 다른 것들의 안부까지 확인하기를.
안녕은 기어이
너를 제자리까지 데려다 놓겠지.
내가 없으면 부족해져줘.
본래 네 것이었던 평온까지
나는 넘보았네.
네가 온전해지는 일마다
나는 조금씩 없어지겠지.
그러니 아주 좋은 날의 끝에서
무엇 하나 놓고 온 사람처럼
잠깐만 뒤를 돌아봐 주세요.
끝내 무엇이 모자란지는
알아내지 못한 채로.

거두다

너는 내게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기울였던 몸을 바로 세우는 일.
세계는 네가 바로 서는 쪽으로 정확했고
한 사람의 각도가 달라지는 일에도
계절 같은 것이 생겼다.
먼저 묻던 안부와
조금 늦게 끝나던 저녁,
말보다 오래 머물던 것들이
하나씩 제자리로 돌아갔다.
너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끝에는 언제나 시작의 증명이 필요했다.
마지막이라 부를 순간도
돌려줄 물건도 없어서
몇 번이나 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상실에도 소유의 이력이 필요했다.
가진 적 없는 것을 잃었다고 하면
누가 빈자리를 믿어줄까.
그래서 기억은 오래
증거의 흉내를 냈다.
네가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래 나를 화나게 했습니다.
네 쪽에 오래 남겨둔 나를
먼저 데려왔다.
그 자리가 비는 일쯤은
네 평온에도 작은 흠이기를.
우리는 헤어진 적이 없어서
나는 오래 헤어지고 있다.
그때 우리가 없었다는 사실만은
조금 기울어 있기를.
나도 너를 잃은 사람일까.

남다

세탁기 안에서 단추 하나가 오래 돌았다.
옷은 이미 꺼냈는데
벽을 치는 소리는 제 할 일을 몰랐다.
빈 통은 몇 번 더 몸을 돌리고
혼자 멎었다.
화분을 치우자 둥근 자리가 남았다.
물을 닦고 흙을 쓸어냈다.
비어 있는 곳이 더 또렷해서
며칠은 그 위를 밟지 않았다.
어느 날에는 발이 먼저 지나갔다.
손톱을 짧게 깎았다.
살을 넘지 않는 길이였다.
그 손으로 귤껍질을 벗겼다.
손끝에서는 저녁 내내
시큼한 냄새가 났다.
저녁이 되자 창문에는 내 얼굴만 비쳤다.
식탁 아래 의자를 하나씩 밀어 넣었다.
둘이어서 잠깐 멈췄다.
의자는 원래 두 개였다.

놓다

네가 컵을 내려놓았다.
유리에는 손가락 몇 개가
흐리게 남아 있었다.
물을 다 마신 뒤에도
손은 한동안 쥐던 모양을 기억한다.
놓음으로 의미는 숨을 거둔다.
쥐었던 손은 오래
빈 것을 쥔 모양으로 남는다.
버스 손잡이를 오래 잡았다.
내릴 곳을 지나칠 뻔해
급히 손을 폈다.
손바닥 한가운데 붉은 선 하나.
자국은 대개 놓은 뒤에 보였다.
현관에는 네 우산이 있었다.
손잡이에 묶인 머리끈을 풀었더니
우산 하나, 고무줄 하나.
망가진 것은 없는데
괜히 미간이 모였다.
그래, 그렇게 원한다면야.
메시지 창에 네 이름을 적었다.
그 아래는 비워두었다.
휴대전화가 어두워져도
나는 한동안 손에서 놓지 못했다.
남아 있다는 것과
살아 있다는 것은 달랐다.
그래, 내가 못 알아들었나 보다.
새벽에는 비가 왔다.
운동화 한 짝만 젖었다.
다른 한 짝은 처마 아래
아무 일 없이 말라 있었다.
물은 그 차이를 모른 채
오래 흘렀다.
아침에
왼손에 하나, 오른손에 하나.
손을 모으면 한 켤레 같았고
젖은 것은 볕에,
마른 것은 현관에 놓았다.
그래, 우습긴 하네.
손을 편다.
한 켤레만 숨을 거둔다.

두다

네가 어제 무엇을 먹었는지,
어느 정류장에서 내렸는지,
요즘 무엇 때문에 늦게 자는지
나는 모른다.
서로 다른 바람이 오래 불었다.
붙잡아두지도, 붙잡히지도 않았다.
몇 달의 빈칸을 굳이 세어본 적도 없다.
오래전에 흘려둔 말 하나가
내가 잊은 뒤에도
네게서 멀쩡히 돌아오곤 했다.
우리는 오랜만이라는 말을 자주 쓰지 않는다.
퍽 다정한 일이었다.
우산을 접어둔 방에서
네 눈가만 늦게 마른날.
나는 가방 지퍼를 끝까지 닫았다가
다시 조금 열어두었다.
네가 고개를 들 때마다
시선 둘 곳을 한 박자씩 놓쳤다.
집에 돌아온 뒤에는
이미 그친 비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여덟 해를 헤아리다 문득 놀랐다.
어느새 우리 사이에도
아름드리 하나쯤의 그늘이 있었다.
네 이름은
속으로도 한 번 거칠어진 적이 없었다.
너는 오래
아껴 부르는 이름 쪽에 있었다.
말은 대개 먼저 끝났고
너는 그 뒤에 남은 얼굴을 오래 봤다.
나는 네 앞에서
말한 것보다 조금 더 많이 들켰다.
어린 네 품은 이상하리만치 포근했어.
말하지 않은 것들도
그 안에서는 오래 숨을 필요가 없었다.
오래 비운 자리에서는
이름부터 거둔다.
의미는 뒤따르고
나는 마음 쓰지 않는다.
우린 여전하다 말해주는
네가 아니라면.
창문 없는 방에서도
하늘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작가의 말

짧은 관계들은
생각보다 강하게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그 흔들림을 들여다보다가
오랫동안 흔들리지 않고 있던 것이
얼마나 드문지 알게 되었습니다.
서로의 하루를 모두 알지 않아도,
몇 달의 빈칸이 생겨도
거두고 싶지 않은 이름이 있었습니다.
몇몇 것은 거두었고,
몇몇 것은 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는
그대로 두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