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조도가 쓴 시를 최근 순으로 읽는 서고입니다.

  1. 배웠다

    너는 겨울보다 먼저 손이 차가워졌습니다. 약은 늘 가방 가장 안쪽에 있었고 아프다는 말은 그보다 조금 더 안쪽에 있었다. 나는 네 손부터 잡았고 너는 괜찮다는 말을 늘 조금 느리게 했다. 네가 나를 감싸 안으면 너의 작은 몸은 나보다도 넓어졌다. 보드라운 네 팔과 숨결 사이에서 추위는 늘 성벽 밖의 일이 되었다. 너는…

  2. 남다

    세탁기 안에서 단추 하나가 오래 돌았다. 옷은 이미 꺼냈는데 벽을 치는 소리는 제 할 일을 몰랐다. 빈 통은 몇 번 더 몸을 돌리고 혼자 멎었다. 화분을 치우자 둥근 자리가 남았다. 물을 닦고 흙을 쓸어냈다. 비어 있는 곳이 더 또렷해서 며칠은 그 위를 밟지 않았다. 어느 날에는 발이 먼저 지나갔다. 손톱을 짧게 깎았다…

  3. 거두다

    너는 내게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기울였던 몸을 바로 세우는 일. 세계는 네가 바로 서는 쪽으로 정확했고 한 사람의 각도가 달라지는 일에도 계절 같은 것이 생겼다. 먼저 묻던 안부와 조금 늦게 끝나던 저녁, 말보다 오래 머물던 것들이 하나씩 제자리로 돌아갔다. 너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끝에는 언제나 시작의 증명이…

  4. 넘보다

    너는 좀처럼 금이 가지 않았고 나는 자꾸 손톱을 길렀습니다. 내가 없으면 부족해져줘. 너는 내 쪽으로 기울던 몸을 바로 세웠다. 그날부터 우리는 같은 거리를 다르게 걸었다. 제발 이 촌극의 선악에 의문을 갖지마. 끝내 버리지 못할 선량함을 나를 위해서만 기꺼이 배반해주었으면 했다. 공평한 너에게 편애를 바라는 일이 내가…

  5. 두다

    네가 어제 무엇을 먹었는지, 어느 정류장에서 내렸는지, 요즘 무엇 때문에 늦게 자는지 나는 모른다. 서로 다른 바람이 오래 불었다. 붙잡아두지도, 붙잡히지도 않았다. 몇 달의 빈칸을 굳이 세어본 적도 없다. 오래전에 흘려둔 말 하나가 내가 잊은 뒤에도 네게서 멀쩡히 돌아오곤 했다. 우리는 오랜만이라는 말을 자주 쓰지 않…

  6. 나누다

    두 분이세요. 직원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물컵 두 개를 내려놓았다. 메뉴판에는 2인분부터 주문 가능. 식당은 사람을 세는 데 별로 망설임이 없다. 오랜만에 마주 앉았는데 너는 내가 싫어하는 파를 네 쪽으로 가져갔다. 나는 그게 조금 고마웠다. 네가 아직 먹는 동안 밥알 몇 개를 괜히 천천히 씹었다. 우리는 밥을 먹었다.…

  7. 놓다

    네가 컵을 내려놓았다. 유리에는 손가락 몇 개가 흐리게 남아 있었다. 물을 다 마신 뒤에도 손은 한동안 쥐던 모양을 기억한다. 놓음으로 의미는 숨을 거둔다. 쥐었던 손은 오래 빈 것을 쥔 모양으로 남는다. 버스 손잡이를 오래 잡았다. 내릴 곳을 지나칠 뻔해 급히 손을 폈다. 손바닥 한가운데 붉은 선 하나. 자국은 대개…

  8. 고르다

    혀에서 나온 것치고 너무 말라 있었다. 너는 단어로 찔렀고 나는 소리로 때렸다. 옆 테이블 숟가락 하나가 잔에 부딪혀 맑게 울었다. 금속은 목소리가 커져도 별로 당황하지 않는다. 나는 그게 조금 얄미웠다. 돌아오는 길 정육점은 셔터를 반쯤 내렸는데 고기가 없어도 붉은 전구는 붉었다. 어릴 때 혀를 세게 깨물면 죽을 수도…

  9. 우연

    햇살은 지나치게 밝고 선선한 바람은 소름 끼치게 기분 좋은 눈에 걸리는 것마다 어색하리만치 반짝이는 날, 드디어, 너를 멈추어 마주 보는 두 시간 무슨 말을 했던 것도 같은데 저절로 숙여지는 고개와 치밀어 오르는 우리의 모습 나를 스쳐가는 이 찰나는 또 얼마나, 나를

  10. 침전

    방을 한 번 정리한 뒤 컵을 씻어 엎어두고 의자는 제자리로, 창문은 끝까지. 남은 것은 없다고 믿기 좋은 모양의 방. 불을 끄고 누우면 낮 동안 잠잠하던 것들이 몸 안쪽으로 천천히 가라앉아 말이 되지 못한 채 가슴 한편에 포개지고, 몇 번이나 돌아누운 끝에 이불속으로 몸을 웅크려도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는 밤. 불을 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