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조도가 쓴 시를 최근 순으로 읽는 서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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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웠다
너는 겨울보다 먼저 손이 차가워졌습니다. 약은 늘 가방 가장 안쪽에 있었고 아프다는 말은 그보다 조금 더 안쪽에 있었다. 나는 네 손부터 잡았고 너는 괜찮다는 말을 늘 조금 느리게 했다. 네가 나를 감싸 안으면 너의 작은 몸은 나보다도 넓어졌다. 보드라운 네 팔과 숨결 사이에서 추위는 늘 성벽 밖의 일이 되었다.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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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
세탁기 안에서 단추 하나가 오래 돌았다. 옷은 이미 꺼냈는데 벽을 치는 소리는 제 할 일을 몰랐다. 빈 통은 몇 번 더 몸을 돌리고 혼자 멎었다. 화분을 치우자 둥근 자리가 남았다. 물을 닦고 흙을 쓸어냈다. 비어 있는 곳이 더 또렷해서 며칠은 그 위를 밟지 않았다. 어느 날에는 발이 먼저 지나갔다. 손톱을 짧게 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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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두다
너는 내게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기울였던 몸을 바로 세우는 일. 세계는 네가 바로 서는 쪽으로 정확했고 한 사람의 각도가 달라지는 일에도 계절 같은 것이 생겼다. 먼저 묻던 안부와 조금 늦게 끝나던 저녁, 말보다 오래 머물던 것들이 하나씩 제자리로 돌아갔다. 너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끝에는 언제나 시작의 증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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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보다
너는 좀처럼 금이 가지 않았고 나는 자꾸 손톱을 길렀습니다. 내가 없으면 부족해져줘. 너는 내 쪽으로 기울던 몸을 바로 세웠다. 그날부터 우리는 같은 거리를 다르게 걸었다. 제발 이 촌극의 선악에 의문을 갖지마. 끝내 버리지 못할 선량함을 나를 위해서만 기꺼이 배반해주었으면 했다. 공평한 너에게 편애를 바라는 일이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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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다
네가 어제 무엇을 먹었는지, 어느 정류장에서 내렸는지, 요즘 무엇 때문에 늦게 자는지 나는 모른다. 서로 다른 바람이 오래 불었다. 붙잡아두지도, 붙잡히지도 않았다. 몇 달의 빈칸을 굳이 세어본 적도 없다. 오래전에 흘려둔 말 하나가 내가 잊은 뒤에도 네게서 멀쩡히 돌아오곤 했다. 우리는 오랜만이라는 말을 자주 쓰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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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다
두 분이세요. 직원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물컵 두 개를 내려놓았다. 메뉴판에는 2인분부터 주문 가능. 식당은 사람을 세는 데 별로 망설임이 없다. 오랜만에 마주 앉았는데 너는 내가 싫어하는 파를 네 쪽으로 가져갔다. 나는 그게 조금 고마웠다. 네가 아직 먹는 동안 밥알 몇 개를 괜히 천천히 씹었다. 우리는 밥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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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다
네가 컵을 내려놓았다. 유리에는 손가락 몇 개가 흐리게 남아 있었다. 물을 다 마신 뒤에도 손은 한동안 쥐던 모양을 기억한다. 놓음으로 의미는 숨을 거둔다. 쥐었던 손은 오래 빈 것을 쥔 모양으로 남는다. 버스 손잡이를 오래 잡았다. 내릴 곳을 지나칠 뻔해 급히 손을 폈다. 손바닥 한가운데 붉은 선 하나. 자국은 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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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다
혀에서 나온 것치고 너무 말라 있었다. 너는 단어로 찔렀고 나는 소리로 때렸다. 옆 테이블 숟가락 하나가 잔에 부딪혀 맑게 울었다. 금속은 목소리가 커져도 별로 당황하지 않는다. 나는 그게 조금 얄미웠다. 돌아오는 길 정육점은 셔터를 반쯤 내렸는데 고기가 없어도 붉은 전구는 붉었다. 어릴 때 혀를 세게 깨물면 죽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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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
햇살은 지나치게 밝고 선선한 바람은 소름 끼치게 기분 좋은 눈에 걸리는 것마다 어색하리만치 반짝이는 날, 드디어, 너를 멈추어 마주 보는 두 시간 무슨 말을 했던 것도 같은데 저절로 숙여지는 고개와 치밀어 오르는 우리의 모습 나를 스쳐가는 이 찰나는 또 얼마나,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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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전
방을 한 번 정리한 뒤 컵을 씻어 엎어두고 의자는 제자리로, 창문은 끝까지. 남은 것은 없다고 믿기 좋은 모양의 방. 불을 끄고 누우면 낮 동안 잠잠하던 것들이 몸 안쪽으로 천천히 가라앉아 말이 되지 못한 채 가슴 한편에 포개지고, 몇 번이나 돌아누운 끝에 이불속으로 몸을 웅크려도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는 밤. 불을 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