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도이어리

조도의 시와 시집을 모아 둔 작은 서가.

우연

햇살은 지나치게 밝고
선선한 바람은 소름 끼치게 기분 좋은
눈에 걸리는 것마다
어색하리만치 반짝이는 날,
드디어,
너를
멈추어 마주 보는 두 시간
무슨 말을 했던 것도 같은데
저절로 숙여지는 고개와
치밀어 오르는 우리의 모습
나를 스쳐가는 이 찰나는 또
얼마나,
나를

침전

방을 한 번 정리한 뒤
컵을 씻어 엎어두고
의자는 제자리로,
창문은 끝까지.
남은 것은 없다고
믿기 좋은 모양의 방.
불을 끄고 누우면
낮 동안 잠잠하던 것들이
몸 안쪽으로 천천히 가라앉아
말이 되지 못한 채
가슴 한편에 포개지고,
몇 번이나 돌아누운 끝에
이불속으로 몸을 웅크려도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는 밤.
불을 끈 뒤에도
방보다 깊은 곳에서
무언가 조금씩
자리를 넓혀왔다.
그날부터
잠보다 먼저 오는 것은
어둠.
그리고 어느 밤부터
눈을 감지 않아도
어둠은
내 쪽에서 먼저 왔다.

창가

네가 오래 바라보는 곳에는
내가 모르는 저녁이 있었다.
내 창에도
오래 켜 둔 불 하나.
그런데 어쩌다
네 빛이 유리에 걸리면
고요하던 방 안에
이름 모를 그늘이 졌다.
나는 불을 끄지 않았고
너는 이쪽을 본 적 없는데
이따금 밤이 깊으면
까닭 없이
창가만 환했다.

곁불

나는 자주
품에 다 들지 않는 것까지
끌어안고
흘러내리는 것 하나쯤
팔꿈치로 밀어 올리며
괜찮다는 쪽으로 웃는다.
어느 저녁,
내가 비운 자리 곁에
오래 머문 시선 하나.
힘주어 쥔 손끝이며
웃고 난 뒤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다 가는
그 사이 나는
또 하루를 고쳐 안고
저녁 속으로.
창마다
불이 하나둘 켜지고
보지 않는 사람에게도
닿는 빛이 있어
그날은
밤이 와도
조금 늦게 추웠다.

편향

오래 이어진 선 하나가
밤의 모양을 이루고 있었고,
먼 별은 어느새
이름 붙지 않은 빛 쪽으로
조금씩 기울고 있는 듯했다.
계절의 가장자리에서
서로 다른 곳을 향하던 빛들이
잠시 가까워 보인 밤이 있었다.
성좌는 흐트러지지 않은 채
그대로 계절을 건넜다.
그뿐이었다.
다만 그 뒤로
익숙한 밤을 올려다보면
그어지지 않은 쪽으로
별 하나가 조금 비껴 있었다.

미열

겨울이 오래 머문 몸에
어느 날부터
좀처럼 식지 않는 열 하나
찬 손등을 이마에 대면
앓는 사람처럼 뜨겁고
가만히 가슴을 짚을 때마다
느린 박동을 따라
조금씩 번져오는
새벽은 여전히 차갑고
창밖의 나무도
어제와 다름없이 앙상한데
이상하지,
언제부턴가
추위가 나를 지나
몸 밖에서만
서성이고 있었다.

한때

저녁이 조금 일찍 내려와
창가에 불 하나가 켜진다.
너는 두 손으로 잔을 감싸고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한다.
나는 다 식은 차를
몇 번이고 입에 가져가며
별것 아닌 대목에서 웃는다.
말이 끊기면
잠시 바깥을 바라본다.
사람들이 하나둘 지나가고
신호등이 몇 번 바뀌는 동안
우리는 한동안
같은 쪽을 보고 있다.
유리에는
불빛과 우리의 얼굴이
희미하게 겹쳐 있다.
날이 다 저물었는데도
누구도 먼저
불을 끄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두 손

밤이 깊어서야
한 사람 몫의 밥을 차리고
식은 것을 데워
숟가락 하나를 놓는다.
그릇 하나 비운 뒤
한참 물에 얼굴을 맡긴다.
흘러내리는 물을 닦고
이불을 목 끝까지
천천히 끌어올리면
손등 위로
다른 손 하나.
한동안
그대로.
오늘은
어느 쪽도
밀어내지 않은 채.

연민

나는 반쯤 타버린 담배 같겠고
후회는 재처럼 흩날려
마음 한 편에 내려앉았다.
나는 가엽고 소중한 것들에게만 기꺼이 졌고
그런 이유로 나는 나에게 져줄 생각이 없었다.
나를 떠나간 모든 것들도
꿈속에서는 늘 곁에 있었다.
나는 많은 날에 의연했으니 더러는 사무쳤다.
심장마저 멈춘 듯한 적막 속에서
나는 눈을 감고
독약 같은 꿈을 삼켰다.
그러면
내 전부를 주어도 부족하다 여겼던 네가 찾아와
손끝으로 우주를 그어
흐르는 은하수로
초라한 나를 씻기는 것이었다.

관성

아침이면 일어나
씻고 옷을 입는다.
해야 할 일을 하고
때가 되면 밥을 먹고
저녁이면 돌아온다.
날이 풀리면 옷이 얇아지고
추워지면 다시 꺼내 입었다.
사람들을 만나
별일 없다는 말을 하고
별일 없이 헤어졌다.
이따금 오래된 이름 하나가
떠오르면
하던 일을 마저 하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이면
또 아침.
그렇게
네 해가 지났다.
별일은 없었다.
그 말이
웬만한 날에는
맞았다.

잔상

빛이 지나간 자리에는
어둠이 바로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검은 눈꺼풀 안쪽으로
보지 않으려던 밝음이 떠올랐고,
고개를 돌리면
비어 있는 것들 위로
지나간 빛의 모양이 겹쳤다.
밤은 몇 번이나 깊어졌는데
그 빛은 조금씩 옅어질 뿐
한 번도 곧장 사라지지 않았다.
눈을 뜬 뒤에도
한동안
어둠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아직

나는 아직
다 지나왔다고 하기에는
가끔 걸음이 늦어지고
남아 있다고 하기에는
이제 돌아보지 않는 것들도 있어
어느 쪽에도
이름을 붙이지 않은 채
여기까지.
나는 아직
끝이라고 부르기에는.

잔열

네가 일어난 자리에는
한동안 사람이 남아 있었다.
손을 얹으면
남은 온기가 천천히 식는 동안
조금 전의 시간이
미처 떠나지 못했고,
나는 괜히
그 자리를 오래 비워 두었다.
밤이 깊을수록
의자는 제 온도로 돌아갔다.
마지막 온기마저 사라진 뒤
그제야 빈자리는
사람 하나의 크기가 되었다.

계절

태양이 한 호흡 일찍 네 창가에 노크하고
지친 발걸음으로 귀가하는 안쓰러운 너를
집까지 데려다주고야 저무는
이 즈음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바람이 조금만 날카로워져도
걱정과 동시에 떠오르던 사람아,
유달리 약하던 너의 건강을 걱정하는 일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걸 보아하니,
네가 좋아했던 음악을 들으며
강가를 거니는 지금이 겨울은 아닌 거겠지.
벚꽃을 보면서
끝이 있음을 슬퍼하기보다는
끝을 알기에 아름다우려 노력하는
기특한 꽃이라 이야기하던 사람아,
네가 유독 좋아하던 이 강가 벚꽃나무에
터질 듯 말듯한 분홍빛 꽃봉오리가
아직 보이지 않는 걸 보아하니,
보드라운 네 손을 꼭 쥐던 나의 손이
주머니에 덩그러니 놓인 지금이
봄은 아닌 거겠지.
계절은 어쩌면
너보다는 나를 조금 더 닮았는지도 몰라.
겨울이 끝남은 곧 봄이던 너와는 달리
나는
겨울이 끝나도 바로 봄이지 못하고
겨울을 그리워하는 잠시간의 미련을 가지니까.
그런 이유로 나는
이 즈음을 첫사랑이라 부르고 싶다.
처음 너의 눈동자를 보고
함께 웃고 울고 춤추며 사랑하다
성숙하지 못한 문법으로 서로를 상처 입히던 칼바람과,
언젠가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여
한 사람의 잠든 숨을 가까이 듣게 될 따뜻한 봄바람의
사이 즈음,
그 어딘가.
너야.

편지

하고 싶었던 말의 발목을 끊은 건
비루한 현실 한 가닥
하지 못했던 말은 하릴없이
마음 안에서 태워야했다.
날 가리는 이 천들은 계속 커지고
너 역시도 계속 커지는데
괜찮냐는 물음을 듣게 되는
미소짓지 않음에 익숙해지고
잠에 드는 일은 낯설어지는
이 우주에서 나가고 싶어
뜨거운 물을 욕조에 가득 담아
헐벗은 나를 넣고 서서히 녹여
내 마음같은 까만 잉크를 만들어
편지를 쓰면 네 마음에 닿을까

그리움

너는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이
문득 가여워지는 사람
태양을 품은 심장과
반으로 가른 달 같은 두 눈,
모아 붙인 구름 같은
새하얀 살결을 가진 사람
별들은 스스로 부끄러워
제 빛을 내어준 뒤 사라졌고
바람마저 네게 빠져
너를 지나쳐 불지 못했던 사람
그리하여
사랑이었다.
둥근 시계 속이 아니었다면
우린 만나지도 못했을 거야.
2190바퀴의 시간,
그 안에서 어김없이 반복된
똑같은 일몰과 똑같은 일출.
그런 영원한 것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은 고결하다 믿었으므로
턱밑까지 올라온 많은 말들을
과감히 내뱉지 못하고
시계는 내일도 둥글 것이니
삼키고 삼키고 삼켰다.
그리하여
이별이었다.
너와 함께였던 모든 시간에
발화되지 못하고
목구멍에서 태워졌던
많은 말들의 재가
그 후 몇 천 바퀴의 시간 동안
네 이름 석 자 위에
거듭 내려앉아
내 마음은 다시 어둠을 입었지만,
이따금 바람이 불어오면
빛나는 네가 새어 나와
내 어둠을 찢는 것이었다.

밤, 비 내리는 밤
자오록한 어둠 위로
망설임 없이 떨어지는 빗방울
부서진 저마다의 눈물이
동심원으로 퍼지는
밤, 역시 비 내리는 밤
지나치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투명하지 않은 우산
조금의 찝찝함도 허락하지 않는 듯
물웅덩이만 찾는
내리꽂힌 시선
흩뿌려진 울음이
어떤 마음에도 닿지 못하는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싶어
여느 때처럼 갤 줄 알아
멋쩍게 웃어 넘긴 밤들이
이제야 사무친다.
고개를 들고
마주하려 해
네 눈물이 내 눈으로 들어와
네 설움이 내게 닿으면
나도
뜨거운 눈물 하나 보탤게.

시는 꼭 잠들기 직전에 지었다.
모두 너에게 전할 편지였다.
잠에 들 때면
어떤 소리도, 빛도 싫었다.
혹 영혼이 빠져나오지
못하면 어쩌나.
난 꿈을 꾸고 싶었으니까.
완벽한 어둠과 적막에서는
내 작은 공간을 감싸는
어떤 물리적 경계도 보이지 않아
어디에도 부딪히지 않고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내 영혼이
멀리멀리 날아가
보고 싶은 널
만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언제 한번 네 꿈에 날 초대해 줘.
완벽한 어둠과 적막 속에서 잠을 청할게.
어둠은 더없이 깨끗하고
밤은 아름다우니
은하수 위에 올라서서
별로 만든 그네를 밀어줄게.
그러다 지치면
초승달에 걸터앉아
숨을 고르고 옷매무새를 정리하자.
꿈이 깰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너에게 전할 시를 읽어줄게.
시는 꼭 잠들기 직전에 지었다.
가장 예쁜 공책에만 적었다.

등대

빛이 없는 세상에서
어둠은 어둠이다.
나는
공기가 움직이는 소리마저
귓가를 위협하는 적막,
수평선 끝까지 이어진 외로움,
누구의 기억에도 닿지 못할 듯한 흐릿함,
그러므로 밤바다였다.
너는 등대
곧게 뻗은 빛줄기,
밤바다를 견디게 하는
함께라는 안도,
내가 여기 있음을
누군가 기억한다는 약속.
그런 이유로
나는 네가 두려웠다.
그리움은
어둠을 지나간 빛 하나가
남겨 둔 자리,
한 번 빛을 품은 어둠이
다시는 처음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틈에서
태어난다.
떠나간 빛이 남긴 자리를
다시 어둠으로 채우는 것은
나름의 배려.
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라 해서
함부로 말하지 마.
가령, 잊었다든가.
빛이 있는 세상에서
어둠은 그저 빛이 없음이다.

그때, 그대.

널 알고 지낸 시간이 벌써 10년이다,
널 앓고 지낸 시간이 벌써 10년이다.
사랑이었다면 그때일,
사랑이라면 그대일.
이 낡은 마음이 이제는 그 빛을 바라길,
이 낡은 마음이 이제는 그 빛을 발하길.
사랑했던 사람아,
사랑하는 사람아.
너의 삶에 내가 한 문장이라도 적힐 수 있다면 그건,
나의 삶에 네가 한 문장으로 적힐 수 있다면 그건.
'가장 큰 사랑을 받았던 시간이었다'가 될 수 있기를,
'가장 큰 사랑을 주었던 시간이었다'가 될 뿐임을.

우정

고맙다는 말
우리 사이에 무슨
손사레 치면서도
정작 나는 수 없이 말하는

마음의 병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렸지.
빠르게 지나치는 자동차들은
날카로운 바람으로 나를 할퀴는 것 같아
나는 애꿎은 고개만 죄인처럼 숙였다.
신호등은 붉은 빛으로 나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이 초록불을
툭- 내던지는 것 같았지.
나는 고개를 숙이고 길을 건너는 일이 익숙해졌어.

안녕

함께일 때 참 쉬웠고
멀어질 때 어려웠으며
곁에 없을 때 곁에 없음을
느끼게 하는

문득

흘러간 시간에 함께 보내지 못한
네가 전했던 예쁜 말들이
떠올라, 문득 떠올라,
이렇게 가슴 아프게 할 줄 몰랐어.

가로등

밤하늘은 여전히 별을 숨기고
가로등은 별이 그리워
애달픈 노란빛을 머리 위로 뿌리는 밤
가로등이 반짝인다는 문장이
낯설게 느껴지는 건
가로등 빛과 별빛이 다르기 때문일까
그저 별이 닿을 수 없이 멀기 때문일까?
넘치는 감정을 지혜롭게 다룰 줄 몰라
부끄러운 일인지도 모르고
진심이라는 미명하에 마구 토해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랄까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나를 덮쳐
모든 의지는
거짓말처럼 나를 외면하고
조금 후련해진들 무슨 소용이야?
너는, 나는, 우리는 그대로인데
진심이 정답이었다면
우아하게 적어내든
폭발하듯 쏟아내든
아무런 상관없었을 테지.
이미 다 알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우리의 하루에 서로가 없음은
답이 적혀있지 않은 해답지.
온 사방에 범벅이 된
'아름다운' 진심을 돌아보며
인상을 쓰게 되는 아이러니.
가로등 마다마다에 별이 걸리고
아스라이 먼 밤하늘에 가로등이 빛나면
너는 모든 아름다운 말들로
가로등을 사랑하지 않았을까?
뭐,
아무런 상관없었을 테지.

산책

푸르른 언덕 위에 올라
생명을 보듬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천천히 녹아들자.
교태로운 바람이 머리 위로 불어와
나를 간지럽히면
향기로운 숨결 내뱉으며
한 호흡 한 호흡
발걸음을 옮기자.
언덕 아래 펼쳐진 드 넓은 대지에서
어린 아이마냥 뜀박질하자.
지치면 걸어도 가면서
지평선만큼 쭉 뻗은 이 대지의
아름다움에 감사하며
계속 걸어나가자.
걷다가 걷다가
서쪽 숲에 다다르면
바람은 점점 거세지고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도
너무 걱정하지 말자.
살금살금
숲 안으로 들어가보자.
푸르고 푸른 생명의 경이로움
심장 뛰고 피가 도는 이유
모두 알게 될지도 모르니

하찮은

여러 건반을 동시에 눌러도
한 음 한 음 구분지을 수 있어
자랑으로 알았다.
그런 하찮은 일 평생 못해도 좋으니
사랑할 때에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알면 좋겠다.
아픔, 슬픔 기쁨 뭐라도 좋으니
두루뭉술한 사랑 말고

회고

반달 모양 눈웃음을 하고는 처음 자기소개를 하던 너와 지금의 네가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새하얀 살결, 이질적일 만큼 검은 눈동자, 살 냄새, 느릿한 말투, 미칠 듯이 그리운 애교나 얇은 발목, 발걸음을 내딛는 각도나 속도, 믿을 수 없이 조그만 주먹, 깨끗한 손톱이나 동그란 어깨 그 모두가 사라졌다면, 너는 내가 기억하는 너와는 달라졌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사랑했던 사람아, 네가 사랑하는 사람일 때에 나는 스스로가 비겁한 사람임을 처음으로 알았다. 너에게 마음을 열고, 내 마음의 목적지로 삼아 끊임없이 걸어가는 이유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왠지 너무 작고 거창하지 못해서 네게 닿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럴듯한 이유들을 집요하게 찾아내어 내 감정의 땔감으로 삼았다. 그러고는 잘도 그런 이야기들을 떠들어댔다.
그게 너에게 부담을 주는 일이라는 걸 알기에는 너무도 어렸으니까. 나는 네가 빛나는 찰나의 순간을 영원으로 이해했지만, 사람은 언제나 빛나지는 못한다. 하지만 너는 끝을 모르고 늘어가는 조건들에 기어코 부합해내는 사람이었다. 날 위해 이 고통스러운 길을 억지로 걸으며 인내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는 너에게 실망했던 기억이 없다.
그래서 더 비참했는지도 모른다. 너는 너로서 완성되는 사람이었지만, 나는 완성된 누군가가 옆에 있지 않으면 빛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나는 그저 너일 수 있는 너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슬픈 건, 너도 어느 정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리라는 것, 그리고 아주 오래도록 나 역시 그렇게 믿었다는 것이다.
니가 지어주던 부드러운 미소에도 마음이 저려오던 이유다. 너와 나누던 문장들과 몸짓들에 중독된 것처럼, 나는 나를 부수면서 너를 향해 비행했다. 이 위태로운 비행의 종착지는 절망이었는데, 비행하는 그 과정은 고통이었는데, 그럼에도 나는 너를 향해 날아서 참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잔인한 사람아, 그럼에도 너는 한때 내가 온 마음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숱한 이유가 나열될 수 있겠지만 처음부터 이유는 하나였다. 나는 너의 따뜻함을 사랑했다. 따뜻한 사람. 네가 따뜻한 사람이어서 나는 끝내 너를 향해 웃음 지었다. 너는 따뜻함으로 잔인했다. 또 너는 잔인함으로 따뜻했다.
너의 따뜻함은 네가 가진 어둠에서 발산되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을 그 상처가 내게 보였을 때,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널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가여운 사람아, 너의 아픔을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감히 만질 수 있는 상처가 아니었으니까. 다만, 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웠고, 그러므로 아름다웠다. 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했고, 그러므로 따뜻했다.
결국 내가 사랑하는, 사랑했던, 따뜻한, 잔인한, 가여운 너는 모두 같은 사람이다. 네가 더 이상 반달 모양 눈웃음을 짓지 않아도, 더 이상 내게 다정한 문장을 건네지 않아도, 너는 달라진 게 아니다. 넌 여전히 그때처럼 따뜻할 테니까. 달라진게 있다면 그건 그저 나의 마음일 뿐이겠지.
다만 바라기를,
사랑하는, 아니 사랑했던 사람아.
부디 사무치는 이 마음만큼은 잊어버리지 않기를.

어둠

지구가 태양을 등지면
흐르는 제 핏방울도 닦지 못하면서
나는 뭐가 그리도 마음 쓰이는지
서서히 다가오는 어둠에
기꺼이 나를 허락한다.
지구와 태양이 유난히 멀어진 듯한
이 계절에는 더 그랬던가.
내 작은 공간이
너의 눈동자로 잠기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죽음을 기대해.
숨을 모두 내뱉고
내 폐를 너의 눈물로 채워
타들어가는 고통에 미소 지으며
그렇게 얼어버렸으면 좋겠어.
나는 살아있을 때,
헤픈 웃음을 방패 삼아
흐르는 내 피가 얼마나 향기로운지
아무도 모르게 감추고 싶다가도
어딘가 높은 곳에 올라
모두가 올려다보는 순간
나신으로 낙화하며
한 번은 울부짖고 싶어져
미칠 것 같거든.
아니면,
다시, 내가,
이 커진 마음이,
흐르는 곳으로,
먼 길을 돌았지만,
다시, 이런 모습이라도,
검은 너의 눈동자 속으로,
목 끝까지 올라온 말들이
끝끝내 발화되지 못하고
유성처럼 아스라지는 이 밤도
아, 결국 너는 곁에 없음으로
나와 함께구나.
따뜻한 사람아,
세상 사람들은 모른다.
빛나는 모든 것들의 열기는
달콤한 눈속임일 뿐이야.
내가 오래 기억한 온기는
어둠에서 났는걸.

그늘진 내 마음처럼
어두웠던 그때의 밤거리 위에는
빛나는 너의 미소처럼
수도 없이 많은 별이 반짝였는데
다 거꾸로야
변했어 우리처럼
오늘 바라본 밤의 하늘은
더 이상 닿을 수 없는 너처럼
캄캄하기만 하고
고개 숙인 이 한숨은
갈피를 못 잡는 내 마음처럼
여기저기서 번쩍이는
이 거리를 맴돈다.

위로

나는 왜 외면하는가
오래 아물지 못해
곪아버린 살결들
사랑했기 때문이지
도려내지 못하는
이 흉터는 모두
너에게서 났으니
영산홍 같은 핏방울이
여전히 선명한
너의 칼날이
다시금 이 살갗을 베어
묵은 고름이 흐르면
나는 돋아나는 새살의 쓰라림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위로받았다 하겠다.

살아있음을 느낀다.
죽고 싶어서

흐리다

배시시 미소 짓던 너의 눈웃음
느릿느릿 걸어가던 뒷모습
너무너무 조그마해서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던 너의 주먹
솜털 눈썹 하얀 피부 비누향 입술 목소리
두 번 다시 느끼지 못하고 있는 그 따뜻함
내가 보고 느낀 모든 너를
평생
잊지 못할 줄 알았는데-.
지금은 사라진
콩불 창가 자리에서
마지막을 말하는 나를
바라보지도 못하고
연거푸 잔을 비우던 니 모습만
선명하다.

온도

그대의 온도
너무 차가운
그대 한 마디
나를 얼리네
그대의 온도
또 너무 뜨거운
오직 그대만이
나를 녹이네

여행

쓸쓸함과 외로움이
혹 배어 나오더라도
낯섦을 방패로 삼아
마음 한편에 떠오른 그대를
마주해도 이상하지 않은
이국의 밤은
바람이 차다.
일상적이지 않은 색감
부피감 또 거리감이
설레면서도 피곤한 건
나의 발걸음이
새로운 곳으로의 나아감이자
그대로부터의 멀어짐이기 때문에-.

지나치다

한 번 사랑에
두 번 이별은
너무 아플 것 같아서.

불나방

중력에 맞서
나를 날아오르게 해 주던
내가 가진 모든 것, 날개
그 날개가 녹아내리고 있음을
아름다운
그리고 빛나는 당신에게로
수천번 비행하던
어느 날엔가 깨달았다.
늘 꿈꿔왔던
사랑에 대한 갈망이
눈 앞에 실체로 다가왔을 때,
이미 막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해
그것들을 모두 버려가며
오로지 당신에게로
끊임없이 비행했음을-.

나는

푹 숙인 너의 얼굴이
외려 나에겐
확신에 찬 모습으로 보였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를 등지고 가는
너의 뒷모습을
아주 잠시
바라보고 돌아설 뿐이었는데
그 잠시가
내 매일이 되었다.
이별을 말하던 사람아,
나는 괜찮다.
부디 미안해하지 말기를.
마지막까지 삼키지 못한
한마디 앞에서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던
그 모습을 보면서도
널 곤란하게 만든
스스로가 미웠으니까.

후회

이렇게 힘들 줄 몰랐던
그때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하는
상상
오늘도 나는
너를 만나기 위해
우리 만남을
후회한다.

찬사

당신이 건네는 가벼운 인사가 반응물로
말도 안 되게 벅찬 행복을 생성하고 있는데
질량보존법칙은 왜 아직도 가르쳐지고 있는지.
이런 케미스트리를 구사하는 당신 앞에 서면
아름답다는 말이 튀어나오는 게 인류의 상식인데
그 말을 듣는 당신은 대체 왜 부끄러운 눈빛을 하는지.
당신을 만나고 나의 세상은
전에 없던 새로움이 되었다.
나라는 단일계가 깨어지고
우리라는 복합계로, 유니버스로
새로운 상식과 질서에 적용되어진다.
나는 여린 목소리로, 어설픈 붓질로
이 기적을 발화하지만
도저히 빛나는 당신께 어울리는 찬사는
찾아낼 수가 없다.
빛나는 사람.
내가 당신께 줄 수 있는 최선의 찬사는 이 것이다.
빛나는 사람아,
지금처럼 반짝이는 빛으로
계속해서 내게 다가와 주기를.
당신이 보여주는 세상에서
당신이 없었다면 볼 수 없었을 일상의 구도를,
이 아름다움을 내게서 다시 가져가지 않기를.

수채화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
굳어있는 고체 물감
맑은 물 한 방울 살짝 올리면
흐드러지며 녹는 빛깔
우리는 그렇게 섞이자.
당신은 한 방울 물에 녹고
나 또한 한 방울 물에 젖어
팔레트 위에서 하나로 만나
푸르른, 따뜻한, 붉은, 영롱한
우리로 그렇게 섞이자.
서로가 단지 서로일 때는
표현할 수 없었던
함께라는 색감으로
아룸다움으로 사랑으로
그렇게 섞이자.

닿다

마주 선 당신의 얼굴은
내 가슴 앞에 놓인다.
조그만 당신의 체구가
문득 너무나 사랑스러워
내 팔로 당신을 감싸
포근히 안아주고 싶어 진다.
당신의 뒷머리를
내 오른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고
내 왼손으로는 당신의 등을
천천히 토닥이고 싶다.
품에 안긴 당신의 정수리에
살짝 입 맞추고
당신을 괴롭히는 나쁜 생각을 밀어내듯
음- 음- 바람불며 장난치고 싶다.
당신에게 닿고 싶어.
내 몸도 내 마음도
내 모든 것 전부 다-.

천천히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맞춰줄 수도 있지만
서로 맞춰가자고 이야기하는 당신이라서
크러쉬, 나비꿈같은
오로지 당신만이 그릴 수 있는 예쁜 세상을
행복한 눈빛으로 내게 들려주는 당신이라서
가끔씩 벅차오르는 뜨거움으로
힘껏 달려가고 싶지만
당신이라는 빛은 내게
너무나도 섬세한 아름다움,
또 부드럽고 순결한 행복 같아서
당신이 놀라지 않게
우리라는 관계가 녹아내리지 않게
완숙한 따뜻함으로 사랑해야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천천히 천천히 다가가야지.

헌책방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책들이
각자의 시간을 품은 채
한곳에 모여 있었다.
접힌 모서리와
희미하게 그어진 밑줄 사이를
우리는 천천히 넘겨갔다.
네가 오래 머문 문장을
나도 따라 읽으며
같은 문장 앞에서
너는 네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나는 책장을 넘기지 않은 채
조금 더 오래 듣고 있었다.
누군가의 지난 시간이
우리의 지금에 잠시 놓였고
우리는
책 한 권을 고르는 데
유난히 오래 걸렸다.

달라지다

차오르는 진심을
정갈히 쏟아낼 자신이 없어
그저 종이 위에 펼쳐내기만 했다.
펜을 놓고 펼쳐진 진심과 마주할 때
난 그저, 그런가 보다 할 뿐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다시 그때의 진심을 마주하면
그제야
정말로 아프고
외로웠던
헐벗은 그때의 내가 보인다.
진심이
자유로 완성되어
달라진 감상으로 드러난다.

완벽한

일상을 표현하면서
자주 사용하는 말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렇게 이질감이 클 수가 없다.

보정

진심에도 보정이 필요하다.
당신의 예쁜 눈동자가
더 빛나게 되는 것처럼,
당신의 티 없는 피부가
더 하얗게 되는 것처럼,
당신의 사랑스러운 미소가
더 눈에 띄게 되는 것처럼,
나의 진심도
더욱 깊이 닿을 수 있도록
더 큰 울림이 될 수 있도록
더 오래 뜨거울 수 있도록
진심에도 보정이 필요하다.

나쁜 일

단조로이 조깅하듯 살아왔다.
누구나 느낄 정도의 죄스러움 몇 번,
특별할 것 없는 정도의 행복 몇 번,
뻔-한, 별 볼일 없는, 딱 그 정도다 내가.
그래서 이번에
마음먹고 나쁜 일 한 번 저지를까 한다.
한 번뿐인 인생-으로 시작하는
진부한 격려의 말 따위에 동조하는 건 아니지만
그 간의 꾸준한 조깅으로 나는,
셀 수도 없이 많은 후회를 흩뿌렸고
지금 내 감정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면
또다시 후회와 부딪히리란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더 이상 후회하기 싫다.
확실히 나는 당신이 궁금하고
당신 곁에 있고 싶고 당신이 좋아.
화려하지도, 멋있지도 않은 사람이지만
곁에 있어주는 건 정말 잘할 수 있으니까
꼭 이기적인 일은 아닐지 모른다.

망설임

나는 망설이고 있다.
당신에게 줄 예쁜 꽃도 준비하고
당신에게 전해질 내 진심도
정갈한 문장으로 다듬어 외워두었는데
당신도 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왜?

미리

미리 알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진부한 상상에 빠진 적이 있다.
미리 알았다면
너에게 건네는 안녕에
물음표 아닌 마침표를 붙일 수 있었을까?
아니, 수 없이 주고받았던
그 따뜻한 안부들을
건넬 수는 있었을까?
과거는 추억으로 승화되고
아팠던 기억들만 결정으로 모여
날카로운 창끝으로 나를 찌르는데
이리될 것을
미리 알았다면
막을 수 있었을까?
지금 너와 나 사이에는
수백수천 자의 벽이 세워져
어떠한 표현도 이제는 닿을 수가 없는데
부질없다 한다.
의미 없다 한다.
미리 알았어도
나는 똑같았겠다 싶어서.

결함

상처받는 이유.
고민하고 좌절하는 이유.
무언갈 채우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으면
하루가 헛되이 흐른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
니가 날 떠난 이유.
글을 쓰는 이유.
생각들을 상대하고 정리하는 이유.
당신을 앞에 두고, 그저 지나칠까 고민했던 이유.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

종착점

네가 내 마음의 종착점인 것만은 확실했다.
발걸음은 점점 느려졌어도
멈춘 적은 없었는데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내는 일조차
상당한 피로감에 망설여질 때,
또 기계적으로 내미는 걸음걸음이
종착점에 대한 사명감이 아닌
지금껏 걸어온 길에 대한 아쉬움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그 순간이 이 여정의 끝이자
그 순간의 그곳이 내 마음의 종착점이 되었다.

영화

자줏빛 모자를 쓰고
마스크도 쓰고
거기에 검은 롱패딩 모자까지 눌러쓴
당신과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본다.
영화는 재미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당신이 편안한지
또 당신이 즐거워하는지
슬며시 당신 손을 잡아도 좋을지만 보인다.
그래, 우리만 보인다.
영화 같다.
당신을 만난 것도
당신과 함께 잇는 것도
함께 보고 있는 영화보다
더 극적인 영화 같아서
그래서, 우리만 보인다.

연주2

당신은 오선지에 그려진
매력적인 선율로 내 곁에 있다.
나는 당신이 연주하고 싶어
떨리는 손으로 당신에게 닿는다.
나는 초견으로 어떤 것도 판단하지 않을 거야.
당신이 발하는 아름다운 선율, 그 안에
혹여 있을지 모르는 슬픔까지도
다 감싸고 싶으니까.
나는 다른 누군가와 같은 식으로 연주하지 않을 거야.
당신이 그리는 음 하나하나에
나만의 화음을 쌓아
전에 없던 풍성함으로 감쌀 거야.
인생이 예술이라면
당신의 지금은
꼭 내가 연주하는 음악이기를-.

연주

인생이 예술이라면
나의 지금은
꼭 당신이 연주하는 음악이기를-.
당신은 아다지시모.
숨이 차오르도록 달리고만 있는 나를
돌아보게 해
내 선율을 부드럽게 하고
또 피아니시모.
강해지기 위해 매정하게 굳어가는
나의 마음에
떨리는 여림으로 닿아온다.
당신이 연주하는 나는
어디에도 없었던
순간의 예술로
아름답게 기억된다.

하얗게

잊는다는 것은 검은색일까?
따뜻한 빛깔로 느껴지던
너와 나의 시간들이 이제는
먹먹한 흑빛으로 흐르니까 말이다.
암은 명의 부재라고 하던데
기억은 전등처럼
스위치를 켜 빛을 내면 보이고
스위치를 꺼 빛을 훔치면 사라지는 걸까?
에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나는 단지
니가 없던, 오로지 나만의
그 하얀 시간이 필요하다.
잊는다는 것만으로는 다시금 돌아갈 수 없는

빼빼로

당신은 예의 그 귀여운 글씨로 성실히 작성한 과제를 제출하였다. 당신이 표현한 문제 풀이의 과정은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나는 그것이 너무나도 아름답게만 느껴져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기가 곤란하였다.
이른 저녁, 나는 용기를 내어 메세지를 보내기로 한다. 왜 과제만 제출하였는지 물었다. 당연한 것. 과제 말고 제출할 것이 없으니까. 역시나 당신은 추가로 제출할 것이 있었는지 반문한다.
잠-시 고민하고, 다시 메세지를 보낸다. 빼빼로를 제출하지 않았다고. 이런 바보 같은 농담에도 당신은 해맑게 웃음을 보내주었다. 그것도 참 많이. 나는 부끄러우면서도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참 오랜만에 설레는 기분이었다.
당신은 참 아름다운 사람인 듯하다.

함께

더 이상 내가
당신을 채점하지 않아도 될 무렵
우리는 식사를 하기로 했다.
3차원 시스템에서
같은 시공간을 점유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새삼 느끼면서
나는 이 기적을 즐기기로 한다.

펜과 종이가 내는 마찰음만이
이 곳의 여백을 채우고 있다.
창가로 들어온 빛줄기가
이 곳의 먼지를 비추고 있다.
시험시간.
나는 지루한 눈빛으로
학생들을 감독할 뿐이다.
왼쪽 맨 뒷줄에서 세 번째.
아까부터 내 시선을 멈춰 세우는
당신이 앉아 있다.
어둠 속에서 한 점의 빛이 보이면
이리도 순수하게 바라만 보게 될까.
무언갈 적기도, 가만히 고민하기도 하는 모습이
대체 뭐라고
계속해서 바라보게 되는 걸까 의아하다.
혼자 빛나는 것 같아-.
나는 사치스럽게도 당신이 궁금하다.

간격

어떤 비유도, 표현도 담아낼 수 없는
그런 비참함이 있다.
내가 느낀 우리 사이의 간격과
네가 느낀 너와 나 사이의 거리감이
무한한 괴리로, 말도 안 되는 부피감으로
내게 보일 때
난 그저 짧게 신음했을 뿐이었다.
내가 가진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비참함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감기

아주 지독한 녀석이군-.
코 푼 휴지들이 꽤나 큰 질량감으로 모여있을 때
나는 생각했다.
감기에 걸리면, 평소엔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소중하게도 다가온다.
코로 들어오던 맑은 공기.
무언가를 삼키기 위해 애써주던 나의 목.
그리고 나른한 오후,
생각들을 상대하며 산책할 수 있게 날 이끌던 활력.
이번 주말은 이렇게 누워서 보내는구나..
싶다가
당신이 보내온 메세지 두 마디에
이 주말도 향기로와진다.
문득, 당신도 나의 감기일까 한다.
아주 아주 독한 감기.
이 나른한 오후에 원초적 감사를 느끼게 하니까.

만남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는 나는
적당히 찬 바람과
적당히 따뜻한 햇살 사이에 서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걷고 있다.
우리도 곧 그 속에서 걷게 되겠지.
어딜 갈까, 무얼 할까 결정해야 하는데
자꾸만 당신의 웃는 모습이 떠올라
참으로 난감하다.

하나

이른 새벽, 학교로 향하는 이 큰 버스에 손님이 나 하나다.
묘한 즐거움을 느낀다.
문득 귀에 걸린 노래 한 소절이 의미로 다가온다.
'나타난 너의 시간이 나의 시간을 훔쳐간다.'
하나가 되는 걸까 싶다가 멈칫한다.
하나가 된다는 건 예쁜 일인데
분명 그렇게 느껴왔는데,
문득 무거운 부피감으로 느껴진다.
어쩌면 하나가 돼야 한다는 집착이
너와 나를 힘들게 한 건지도 몰라.
우리는 복수형이다.
하나가 아니야.
누군가가 자신을 버림으로써 완성되는 관계가
아름답고 건강할리 없다는 당연한 명제를
오늘에서야 참으로 판정한다.

승패

이기고 지는 일이
단순한 결과나 정보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쓰게 되는 이유, 기대.
무언가를 바라게 되면
우리는 더 큰 기대와 실망이라는
두 갈레길을 끊임없이 걷게 될 뿐이다.
마음 쓰지 말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의미 있지만,
의미를 지우는 일은 가치 있다.
승패를 그저 승패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가 되기를
가치 있는 내가
불만족의 굴레에서 닳고 아프지 않기를

무엇이든

무엇이든
나를 떠나버린 모든 것들이
남긴 그 빈자리를
그저 추억으로
새로운 가능성으로
오로지 빈자리로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린 건지

소수

다수에 대한 객체
그 자체로 주체가 되기 어려운 집단
하지만
다수의 다수야말로
소수에 대한 객체이며
그 자체로 주체가 되지 못한 집단 아닌가?

귀가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도
칼바람에는 베이는구나
고개 숙인 입김으로 신음한다.
오늘도 하루만큼 닳았다.
가슴 뜨거워지는 꿈이랄 게
나도 하나쯤 있었던 것 같은데
꿈을 꾸는 건지, 꿈을 꿨던 건지
오갈 데 없는 후회와 달리
몸은 캄캄한 집으로 향한다.
신을 벗고, 벽을 짚는다.
공허 속에 맨발이 집 바닥에 닿는다.
소름 끼치게 찬 겨울이구나.
나는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