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달 모양 눈웃음을 하고는 처음 자기소개를 하던 너와 지금의 네가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새하얀 살결, 이질적일 만큼 검은 눈동자, 살 냄새, 느릿한 말투, 미칠 듯이 그리운 애교나 얇은 발목, 발걸음을 내딛는 각도나 속도, 믿을 수 없이 조그만 주먹, 깨끗한 손톱이나 동그란 어깨 그 모두가 사라졌다면, 너는 내가 기억하는 너와는 달라졌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사랑했던 사람아, 네가 사랑하는 사람일 때에 나는 스스로가 비겁한 사람임을 처음으로 알았다. 너에게 마음을 열고, 내 마음의 목적지로 삼아 끊임없이 걸어가는 이유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왠지 너무 작고 거창하지 못해서 네게 닿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럴듯한 이유들을 집요하게 찾아내어 내 감정의 땔감으로 삼았다. 그러고는 잘도 그런 이야기들을 떠들어댔다.
그게 너에게 부담을 주는 일이라는 걸 알기에는 너무도 어렸으니까. 나는 네가 빛나는 찰나의 순간을 영원으로 이해했지만, 사람은 언제나 빛나지는 못한다. 하지만 너는 끝을 모르고 늘어가는 조건들에 기어코 부합해내는 사람이었다. 날 위해 이 고통스러운 길을 억지로 걸으며 인내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는 너에게 실망했던 기억이 없다.
그래서 더 비참했는지도 모른다. 너는 너로서 완성되는 사람이었지만, 나는 완성된 누군가가 옆에 있지 않으면 빛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나는 그저 너일 수 있는 너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슬픈 건, 너도 어느 정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리라는 것, 그리고 아주 오래도록 나 역시 그렇게 믿었다는 것이다.
니가 지어주던 부드러운 미소에도 마음이 저려오던 이유다. 너와 나누던 문장들과 몸짓들에 중독된 것처럼, 나는 나를 부수면서 너를 향해 비행했다. 이 위태로운 비행의 종착지는 절망이었는데, 비행하는 그 과정은 고통이었는데, 그럼에도 나는 너를 향해 날아서 참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잔인한 사람아, 그럼에도 너는 한때 내가 온 마음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숱한 이유가 나열될 수 있겠지만 처음부터 이유는 하나였다. 나는 너의 따뜻함을 사랑했다. 따뜻한 사람. 네가 따뜻한 사람이어서 나는 끝내 너를 향해 웃음 지었다. 너는 따뜻함으로 잔인했다. 또 너는 잔인함으로 따뜻했다.
너의 따뜻함은 네가 가진 어둠에서 발산되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을 그 상처가 내게 보였을 때,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널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가여운 사람아, 너의 아픔을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감히 만질 수 있는 상처가 아니었으니까. 다만, 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웠고, 그러므로 아름다웠다. 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했고, 그러므로 따뜻했다.
결국 내가 사랑하는, 사랑했던, 따뜻한, 잔인한, 가여운 너는 모두 같은 사람이다. 네가 더 이상 반달 모양 눈웃음을 짓지 않아도, 더 이상 내게 다정한 문장을 건네지 않아도, 너는 달라진 게 아니다. 넌 여전히 그때처럼 따뜻할 테니까. 달라진게 있다면 그건 그저 나의 마음일 뿐이겠지.
다만 바라기를,
사랑하는, 아니 사랑했던 사람아.
부디 사무치는 이 마음만큼은 잊어버리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