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다 식지 않은 마음에 관하여

서문

사라진 것은 모두 끝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말은 시간과 함께 흘러가지 못했고,
어떤 빛은 눈을 감은 뒤에도 남았으며,
어떤 온기는 사람이 떠난 자리에서 오래 식어갔습니다.
이 시들은
그렇게 지나갔으나 사라지지 않은 것들에 관한 기록입니다.
나는 아직.
그 뒤의 말은
오래도록 하나로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차례

  1. 귀가
  2. 한때
  3. 헌책방
  4. 꿈
  5. 나는
  6. 문득
  7. 곁불
  8. 잔상
  9. 잔열
  10. 침전
  11. 어둠
  12. 등대
  13. 위로
  14. 그리움
  15. 계절
  16. 관성
  17. 연민
  18. 두 손
  19. 비
  20. 회고
  21. 그때, 그대.
  22. 우연
  23. 결함
  24. 만남
  25. 편향
  26. 미열
  27. 창가
  28. 나는 아직

귀가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도
칼바람에는 베이는구나
고개 숙인 입김으로 신음한다.
오늘도 하루만큼 닳았다.
가슴 뜨거워지는 꿈이랄 게
나도 하나쯤 있었던 것 같은데
꿈을 꾸는 건지, 꿈을 꿨던 건지
오갈 데 없는 후회와 달리
몸은 캄캄한 집으로 향한다.
신을 벗고, 벽을 짚는다.
공허 속에 맨발이 집 바닥에 닿는다.
소름 끼치게 찬 겨울이구나.
나는 아직.

한때

저녁이 조금 일찍 내려와
창가에 불 하나가 켜진다.
너는 두 손으로 잔을 감싸고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한다.
나는 다 식은 차를
몇 번이고 입에 가져가며
별것 아닌 대목에서 웃는다.
말이 끊기면
잠시 바깥을 바라본다.
사람들이 하나둘 지나가고
신호등이 몇 번 바뀌는 동안
우리는 한동안
같은 쪽을 보고 있다.
유리에는
불빛과 우리의 얼굴이
희미하게 겹쳐 있다.
날이 다 저물었는데도
누구도 먼저
불을 끄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헌책방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책들이
각자의 시간을 품은 채
한곳에 모여 있었다.
접힌 모서리와
희미하게 그어진 밑줄 사이를
우리는 천천히 넘겨갔다.
네가 오래 머문 문장을
나도 따라 읽으며
같은 문장 앞에서
너는 네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나는 책장을 넘기지 않은 채
조금 더 오래 듣고 있었다.
누군가의 지난 시간이
우리의 지금에 잠시 놓였고
우리는
책 한 권을 고르는 데
유난히 오래 걸렸다.

꿈

시는 꼭 잠들기 직전에 지었다.
모두 너에게 전할 편지였다.
잠에 들 때면
어떤 소리도, 빛도 싫었다.
혹 영혼이 빠져나오지
못하면 어쩌나.
난 꿈을 꾸고 싶었으니까.
완벽한 어둠과 적막에서는
내 작은 공간을 감싸는
어떤 물리적 경계도 보이지 않아
어디에도 부딪히지 않고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내 영혼이
멀리멀리 날아가
보고 싶은 널
만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언제 한번 네 꿈에 날 초대해 줘.
완벽한 어둠과 적막 속에서 잠을 청할게.
어둠은 더없이 깨끗하고
밤은 아름다우니
은하수 위에 올라서서
별로 만든 그네를 밀어줄게.
그러다 지치면
초승달에 걸터앉아
숨을 고르고 옷매무새를 정리하자.
꿈이 깰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너에게 전할 시를 읽어줄게.
시는 꼭 잠들기 직전에 지었다.
가장 예쁜 공책에만 적었다.

나는

푹 숙인 너의 얼굴이
외려 나에겐
확신에 찬 모습으로 보였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를 등지고 가는
너의 뒷모습을
아주 잠시
바라보고 돌아설 뿐이었는데
그 잠시가
내 매일이 되었다.
이별을 말하던 사람아,
나는 괜찮다.
부디 미안해하지 말기를.
마지막까지 삼키지 못한
한마디 앞에서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던
그 모습을 보면서도
널 곤란하게 만든
스스로가 미웠으니까.

문득

흘러간 시간에 함께 보내지 못한
네가 전했던 예쁜 말들이
떠올라, 문득 떠올라,
이렇게 가슴 아프게 할 줄 몰랐어.

곁불

나는 자주
품에 다 들지 않는 것까지
끌어안고
흘러내리는 것 하나쯤
팔꿈치로 밀어 올리며
괜찮다는 쪽으로 웃는다.
어느 저녁,
내가 비운 자리 곁에
오래 머문 시선 하나.
힘주어 쥔 손끝이며
웃고 난 뒤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다 가는
그 사이 나는
또 하루를 고쳐 안고
저녁 속으로.
창마다
불이 하나둘 켜지고
보지 않는 사람에게도
닿는 빛이 있어
그날은
밤이 와도
조금 늦게 추웠다.

잔상

빛이 지나간 자리에는
어둠이 바로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검은 눈꺼풀 안쪽으로
보지 않으려던 밝음이 떠올랐고,
고개를 돌리면
비어 있는 것들 위로
지나간 빛의 모양이 겹쳤다.
밤은 몇 번이나 깊어졌는데
그 빛은 조금씩 옅어질 뿐
한 번도 곧장 사라지지 않았다.
눈을 뜬 뒤에도
한동안
어둠은 돌아오지 않았다.

잔열

네가 일어난 자리에는
한동안 사람이 남아 있었다.
손을 얹으면
남은 온기가 천천히 식는 동안
조금 전의 시간이
미처 떠나지 못했고,
나는 괜히
그 자리를 오래 비워 두었다.
밤이 깊을수록
의자는 제 온도로 돌아갔다.
마지막 온기마저 사라진 뒤
그제야 빈자리는
사람 하나의 크기가 되었다.

침전

방을 한 번 정리한 뒤
컵을 씻어 엎어두고
의자는 제자리로,
창문은 끝까지.
남은 것은 없다고
믿기 좋은 모양의 방.
불을 끄고 누우면
낮 동안 잠잠하던 것들이
몸 안쪽으로 천천히 가라앉아
말이 되지 못한 채
가슴 한편에 포개지고,
몇 번이나 돌아누운 끝에
이불속으로 몸을 웅크려도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는 밤.
불을 끈 뒤에도
방보다 깊은 곳에서
무언가 조금씩
자리를 넓혀왔다.
그날부터
잠보다 먼저 오는 것은
어둠.
그리고 어느 밤부터
눈을 감지 않아도
어둠은
내 쪽에서 먼저 왔다.

어둠

지구가 태양을 등지면
흐르는 제 핏방울도 닦지 못하면서
나는 뭐가 그리도 마음 쓰이는지
서서히 다가오는 어둠에
기꺼이 나를 허락한다.
지구와 태양이 유난히 멀어진 듯한
이 계절에는 더 그랬던가.
내 작은 공간이
너의 눈동자로 잠기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죽음을 기대해.
숨을 모두 내뱉고
내 폐를 너의 눈물로 채워
타들어가는 고통에 미소 지으며
그렇게 얼어버렸으면 좋겠어.
나는 살아있을 때,
헤픈 웃음을 방패 삼아
흐르는 내 피가 얼마나 향기로운지
아무도 모르게 감추고 싶다가도
어딘가 높은 곳에 올라
모두가 올려다보는 순간
나신으로 낙화하며
한 번은 울부짖고 싶어져
미칠 것 같거든.
아니면,
다시, 내가,
이 커진 마음이,
흐르는 곳으로,
먼 길을 돌았지만,
다시, 이런 모습이라도,
검은 너의 눈동자 속으로,
목 끝까지 올라온 말들이
끝끝내 발화되지 못하고
유성처럼 아스라지는 이 밤도
아, 결국 너는 곁에 없음으로
나와 함께구나.
따뜻한 사람아,
세상 사람들은 모른다.
빛나는 모든 것들의 열기는
달콤한 눈속임일 뿐이야.
내가 오래 기억한 온기는
어둠에서 났는걸.

등대

빛이 없는 세상에서
어둠은 어둠이다.
나는
공기가 움직이는 소리마저
귓가를 위협하는 적막,
수평선 끝까지 이어진 외로움,
누구의 기억에도 닿지 못할 듯한 흐릿함,
그러므로 밤바다였다.
너는 등대
곧게 뻗은 빛줄기,
밤바다를 견디게 하는
함께라는 안도,
내가 여기 있음을
누군가 기억한다는 약속.
그런 이유로
나는 네가 두려웠다.
그리움은
어둠을 지나간 빛 하나가
남겨 둔 자리,
한 번 빛을 품은 어둠이
다시는 처음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틈에서
태어난다.
떠나간 빛이 남긴 자리를
다시 어둠으로 채우는 것은
나름의 배려.
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라 해서
함부로 말하지 마.
가령, 잊었다든가.
빛이 있는 세상에서
어둠은 그저 빛이 없음이다.

위로

나는 왜 외면하는가
오래 아물지 못해
곪아버린 살결들
사랑했기 때문이지
도려내지 못하는
이 흉터는 모두
너에게서 났으니
영산홍 같은 핏방울이
여전히 선명한
너의 칼날이
다시금 이 살갗을 베어
묵은 고름이 흐르면
나는 돋아나는 새살의 쓰라림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위로받았다 하겠다.

그리움

너는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이
문득 가여워지는 사람
태양을 품은 심장과
반으로 가른 달 같은 두 눈,
모아 붙인 구름 같은
새하얀 살결을 가진 사람
별들은 스스로 부끄러워
제 빛을 내어준 뒤 사라졌고
바람마저 네게 빠져
너를 지나쳐 불지 못했던 사람
그리하여
사랑이었다.
둥근 시계 속이 아니었다면
우린 만나지도 못했을 거야.
2190바퀴의 시간,
그 안에서 어김없이 반복된
똑같은 일몰과 똑같은 일출.
그런 영원한 것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은 고결하다 믿었으므로
턱밑까지 올라온 많은 말들을
과감히 내뱉지 못하고
시계는 내일도 둥글 것이니
삼키고 삼키고 삼켰다.
그리하여
이별이었다.
너와 함께였던 모든 시간에
발화되지 못하고
목구멍에서 태워졌던
많은 말들의 재가
그 후 몇 천 바퀴의 시간 동안
네 이름 석 자 위에
거듭 내려앉아
내 마음은 다시 어둠을 입었지만,
이따금 바람이 불어오면
빛나는 네가 새어 나와
내 어둠을 찢는 것이었다.

계절

태양이 한 호흡 일찍 네 창가에 노크하고
지친 발걸음으로 귀가하는 안쓰러운 너를
집까지 데려다주고야 저무는
이 즈음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바람이 조금만 날카로워져도
걱정과 동시에 떠오르던 사람아,
유달리 약하던 너의 건강을 걱정하는 일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걸 보아하니,
네가 좋아했던 음악을 들으며
강가를 거니는 지금이 겨울은 아닌 거겠지.
벚꽃을 보면서
끝이 있음을 슬퍼하기보다는
끝을 알기에 아름다우려 노력하는
기특한 꽃이라 이야기하던 사람아,
네가 유독 좋아하던 이 강가 벚꽃나무에
터질 듯 말듯한 분홍빛 꽃봉오리가
아직 보이지 않는 걸 보아하니,
보드라운 네 손을 꼭 쥐던 나의 손이
주머니에 덩그러니 놓인 지금이
봄은 아닌 거겠지.
계절은 어쩌면
너보다는 나를 조금 더 닮았는지도 몰라.
겨울이 끝남은 곧 봄이던 너와는 달리
나는
겨울이 끝나도 바로 봄이지 못하고
겨울을 그리워하는 잠시간의 미련을 가지니까.
그런 이유로 나는
이 즈음을 첫사랑이라 부르고 싶다.
처음 너의 눈동자를 보고
함께 웃고 울고 춤추며 사랑하다
성숙하지 못한 문법으로 서로를 상처 입히던 칼바람과,
언젠가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여
한 사람의 잠든 숨을 가까이 듣게 될 따뜻한 봄바람의
사이 즈음,
그 어딘가.
너야.

관성

아침이면 일어나
씻고 옷을 입는다.
해야 할 일을 하고
때가 되면 밥을 먹고
저녁이면 돌아온다.
날이 풀리면 옷이 얇아지고
추워지면 다시 꺼내 입었다.
사람들을 만나
별일 없다는 말을 하고
별일 없이 헤어졌다.
이따금 오래된 이름 하나가
떠오르면
하던 일을 마저 하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이면
또 아침.
그렇게
네 해가 지났다.
별일은 없었다.
그 말이
웬만한 날에는
맞았다.

연민

나는 반쯤 타버린 담배 같겠고
후회는 재처럼 흩날려
마음 한 편에 내려앉았다.
나는 가엽고 소중한 것들에게만 기꺼이 졌고
그런 이유로 나는 나에게 져줄 생각이 없었다.
나를 떠나간 모든 것들도
꿈속에서는 늘 곁에 있었다.
나는 많은 날에 의연했으니 더러는 사무쳤다.
심장마저 멈춘 듯한 적막 속에서
나는 눈을 감고
독약 같은 꿈을 삼켰다.
그러면
내 전부를 주어도 부족하다 여겼던 네가 찾아와
손끝으로 우주를 그어
흐르는 은하수로
초라한 나를 씻기는 것이었다.

두 손

밤이 깊어서야
한 사람 몫의 밥을 차리고
식은 것을 데워
숟가락 하나를 놓는다.
그릇 하나 비운 뒤
한참 물에 얼굴을 맡긴다.
흘러내리는 물을 닦고
이불을 목 끝까지
천천히 끌어올리면
손등 위로
다른 손 하나.
한동안
그대로.
오늘은
어느 쪽도
밀어내지 않은 채.

비

밤, 비 내리는 밤
자오록한 어둠 위로
망설임 없이 떨어지는 빗방울
부서진 저마다의 눈물이
동심원으로 퍼지는
밤, 역시 비 내리는 밤
지나치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투명하지 않은 우산
조금의 찝찝함도 허락하지 않는 듯
물웅덩이만 찾는
내리꽂힌 시선
흩뿌려진 울음이
어떤 마음에도 닿지 못하는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싶어
여느 때처럼 갤 줄 알아
멋쩍게 웃어 넘긴 밤들이
이제야 사무친다.
고개를 들고
마주하려 해
네 눈물이 내 눈으로 들어와
네 설움이 내게 닿으면
나도
뜨거운 눈물 하나 보탤게.

회고

반달 모양 눈웃음을 하고는 처음 자기소개를 하던 너와 지금의 네가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새하얀 살결, 이질적일 만큼 검은 눈동자, 살 냄새, 느릿한 말투, 미칠 듯이 그리운 애교나 얇은 발목, 발걸음을 내딛는 각도나 속도, 믿을 수 없이 조그만 주먹, 깨끗한 손톱이나 동그란 어깨 그 모두가 사라졌다면, 너는 내가 기억하는 너와는 달라졌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사랑했던 사람아, 네가 사랑하는 사람일 때에 나는 스스로가 비겁한 사람임을 처음으로 알았다. 너에게 마음을 열고, 내 마음의 목적지로 삼아 끊임없이 걸어가는 이유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왠지 너무 작고 거창하지 못해서 네게 닿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럴듯한 이유들을 집요하게 찾아내어 내 감정의 땔감으로 삼았다. 그러고는 잘도 그런 이야기들을 떠들어댔다.
그게 너에게 부담을 주는 일이라는 걸 알기에는 너무도 어렸으니까. 나는 네가 빛나는 찰나의 순간을 영원으로 이해했지만, 사람은 언제나 빛나지는 못한다. 하지만 너는 끝을 모르고 늘어가는 조건들에 기어코 부합해내는 사람이었다. 날 위해 이 고통스러운 길을 억지로 걸으며 인내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는 너에게 실망했던 기억이 없다.
그래서 더 비참했는지도 모른다. 너는 너로서 완성되는 사람이었지만, 나는 완성된 누군가가 옆에 있지 않으면 빛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나는 그저 너일 수 있는 너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슬픈 건, 너도 어느 정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리라는 것, 그리고 아주 오래도록 나 역시 그렇게 믿었다는 것이다.
니가 지어주던 부드러운 미소에도 마음이 저려오던 이유다. 너와 나누던 문장들과 몸짓들에 중독된 것처럼, 나는 나를 부수면서 너를 향해 비행했다. 이 위태로운 비행의 종착지는 절망이었는데, 비행하는 그 과정은 고통이었는데, 그럼에도 나는 너를 향해 날아서 참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잔인한 사람아, 그럼에도 너는 한때 내가 온 마음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숱한 이유가 나열될 수 있겠지만 처음부터 이유는 하나였다. 나는 너의 따뜻함을 사랑했다. 따뜻한 사람. 네가 따뜻한 사람이어서 나는 끝내 너를 향해 웃음 지었다. 너는 따뜻함으로 잔인했다. 또 너는 잔인함으로 따뜻했다.
너의 따뜻함은 네가 가진 어둠에서 발산되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을 그 상처가 내게 보였을 때,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널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가여운 사람아, 너의 아픔을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감히 만질 수 있는 상처가 아니었으니까. 다만, 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웠고, 그러므로 아름다웠다. 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했고, 그러므로 따뜻했다.
결국 내가 사랑하는, 사랑했던, 따뜻한, 잔인한, 가여운 너는 모두 같은 사람이다. 네가 더 이상 반달 모양 눈웃음을 짓지 않아도, 더 이상 내게 다정한 문장을 건네지 않아도, 너는 달라진 게 아니다. 넌 여전히 그때처럼 따뜻할 테니까. 달라진게 있다면 그건 그저 나의 마음일 뿐이겠지.
다만 바라기를,
사랑하는, 아니 사랑했던 사람아.
부디 사무치는 이 마음만큼은 잊어버리지 않기를.

그때, 그대.

널 알고 지낸 시간이 벌써 10년이다,
널 앓고 지낸 시간이 벌써 10년이다.
사랑이었다면 그때일,
사랑이라면 그대일.
이 낡은 마음이 이제는 그 빛을 바라길,
이 낡은 마음이 이제는 그 빛을 발하길.
사랑했던 사람아,
사랑하는 사람아.
너의 삶에 내가 한 문장이라도 적힐 수 있다면 그건,
나의 삶에 네가 한 문장으로 적힐 수 있다면 그건.
'가장 큰 사랑을 받았던 시간이었다'가 될 수 있기를,
'가장 큰 사랑을 주었던 시간이었다'가 될 뿐임을.

우연

햇살은 지나치게 밝고
선선한 바람은 소름 끼치게 기분 좋은
눈에 걸리는 것마다
어색하리만치 반짝이는 날,
드디어,
너를
멈추어 마주 보는 두 시간
무슨 말을 했던 것도 같은데
저절로 숙여지는 고개와
치밀어 오르는 우리의 모습
나를 스쳐가는 이 찰나는 또
얼마나,
나를

결함

상처받는 이유.
고민하고 좌절하는 이유.
무언갈 채우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으면
하루가 헛되이 흐른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
니가 날 떠난 이유.
글을 쓰는 이유.
생각들을 상대하고 정리하는 이유.
당신을 앞에 두고, 그저 지나칠까 고민했던 이유.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

만남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는 나는
적당히 찬 바람과
적당히 따뜻한 햇살 사이에 서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걷고 있다.
우리도 곧 그 속에서 걷게 되겠지.
어딜 갈까, 무얼 할까 결정해야 하는데
자꾸만 당신의 웃는 모습이 떠올라
참으로 난감하다.

편향

오래 이어진 선 하나가
밤의 모양을 이루고 있었고,
먼 별은 어느새
이름 붙지 않은 빛 쪽으로
조금씩 기울고 있는 듯했다.
계절의 가장자리에서
서로 다른 곳을 향하던 빛들이
잠시 가까워 보인 밤이 있었다.
성좌는 흐트러지지 않은 채
그대로 계절을 건넜다.
그뿐이었다.
다만 그 뒤로
익숙한 밤을 올려다보면
그어지지 않은 쪽으로
별 하나가 조금 비껴 있었다.

미열

겨울이 오래 머문 몸에
어느 날부터
좀처럼 식지 않는 열 하나
찬 손등을 이마에 대면
앓는 사람처럼 뜨겁고
가만히 가슴을 짚을 때마다
느린 박동을 따라
조금씩 번져오는
새벽은 여전히 차갑고
창밖의 나무도
어제와 다름없이 앙상한데
이상하지,
언제부턴가
추위가 나를 지나
몸 밖에서만
서성이고 있었다.

창가

네가 오래 바라보는 곳에는
내가 모르는 저녁이 있었다.
내 창에도
오래 켜 둔 불 하나.
그런데 어쩌다
네 빛이 유리에 걸리면
고요하던 방 안에
이름 모를 그늘이 졌다.
나는 불을 끄지 않았고
너는 이쪽을 본 적 없는데
이따금 밤이 깊으면
까닭 없이
창가만 환했다.

나는 아직

나는 아직
다 지나왔다고 하기에는
가끔 걸음이 늦어지고
남아 있다고 하기에는
이제 돌아보지 않는 것들도 있어
어느 쪽에도
이름을 붙이지 않은 채
여기까지.
나는 아직
끝이라고 부르기에는.

작가의 말

돌아보니
상처도 그리움도
굳이 없었던 일이 될 필요는 없었습니다.
한때 나를 아프게 했던 것들이
어느 날에는 나를 이해하게 했고,
마침내 다른 사람의 아픔을 바라보게 했으니까요.
이 시들은 여러 해에 걸쳐 쓰였습니다.
몇 편은 아주 나중에,
비어 있던 자리를 알아보고서야 쓰였습니다.
끝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마음도
언젠가부터 조금은 다정하게 보였습니다.